한국, 월드컵 출전 약사
2014-04-26 출처: 스포츠서울
2014년 브라질 월드컵(6월 13일~7월 14일)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2-0으로 꺾고 기분 좋게 출발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한국은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 5회 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이번 브라질 대회까지 통산 9회, 8회 연속 월드컵에 나선다. 결코 쉽지 않은 기록이다.
월드컵과 한국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때마다 한국 축구는 발전 방안을 모색했고 그런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경기력 수준을 끌어올렸고 2002년 한일 대회 4강과 2010년 남아공 대회 16강의 성과를 일궜다.
축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대표팀으로 김용식 선생이 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러나 일본이 1938년 제 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김용식,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한국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축구 팬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와 경기를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한국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팀 훈련에 소집됐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국내 축구계는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선결 요건인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을 서둘러 1948년 5월 21일 FIFA 가맹국이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가 1948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었으나 8강전에서 대회 우승국인 스웨덴에 0-12로 크게 져 탈락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배로 갈아타고 요코하마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 프로펠러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며 대회 장소에 갔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건 애시당초 무리였다.
이 대회 이후 한국 축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 차례 출전한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동 출전권을 갖고 나서기까지 오랜 기간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 이제는 없는 나라)에 0-10으로 대패했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1938년 제 3회 대회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1942년과 1946년 대회를 건너뛴 월드컵은 1950년 제 4회 대회가 브라질에서 열렸다. 그러나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인 대회 기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대회에 나설 생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민족상잔 전쟁으로 포연이 가득했다.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 5회 월드컵에서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티켓은 한 장이었다.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기권해 아시아 지역 예선은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이때는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대일 정책으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불허해 도쿄에서 두 차례 경기를 치러 한국이 1승1무(5-1 2-2)로 본선 출전권을 차지했다. 선수단이 출국하기 전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한 “일본에 지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玄海灘 겐카이나다]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은 그 무렵 시대상을 반영한다.
한국은 스위스 월드컵 본선 2조 첫 경기에서 헝가리에 0-9, 두 번째 경기에서 터키에 0-7로 크게 져 2패로 조기 탈락했다. 항가리는 결승전에서 서독에 2-3으로 졌지만 8강전에서 브라질을 4-2로 꺾는 등 스타플레이어 푸스카스를 앞세운 세계 최강 전력이었다. 이 대회와 런던 올림픽 모든 경기에 출전한 홍덕영은 푸스카스 등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느라 가슴과 배가 얼얼할 정도였다고 했다. 홍덕영은 함흥철~이세연 그리고 이운재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 골키퍼 계보의 1세대다.
19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과 관련해 한국 축구는 창피한 일이 있었다. 협회 관계자의 실수로 예선 참가 신청서를 제때 내지 못해 출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56년 9월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을 2-1로 꺾는 등 2승 1무로 초대 챔피언이 돼 나름대로 경기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아쉽기만 했다.
이 대회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에 0.5장의 티켓이 배정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공(오늘날의 중국)이 인도네시아와 1차 예선에서 맞붙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당시 아시아축구연맹 소속)이 아시아·아프리카 대표가 돼 웨일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 2패(0-2 0-2)해 아시아 나라는 본선에 나서지 못했다. 한국은 1960년 서울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안컵에서도 이스라엘을 3-0으로 이기는 등 3승으로 우승했다. 가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을 가운데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웨일즈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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